대도무문 63년, 파란의 YS 정치역정 대도무문 63년, 파란의 YS 정치역정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투쟁에 나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2년, 가택연금당시 남겼던 이 말은 지금도 회자되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다. 한국 근대 정치사의... 대도무문 63년, 파란의 YS 정치역정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투쟁에 나섰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2년, 가택연금당시 남겼던 이 말은 지금도 회자되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다.

한국 근대 정치사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영면했다. 향년 88세. 25세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은 기록. 국회의원 9선, 야당 대표 3번.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는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은 YS의 좌우명. 군부독재시절 가택연금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일화는 한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말이 되기도 했다.

대통령당선후 금융실명제, 하나회숙청 등 거침없는 개혁에 나섰지만, 임기말 외환위기로 경제타탄에 빠진 국가경제의 위기와 측근 비리 등은 그에게 뼈아픈 오점으로 남아있다.

■ 25세 최연소 국회의원, 한국 근대 정치사 최대 거목으로 우뚝서기까지

YS는 1951년 당시 장택상 국회부의장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다. 국무총리로 영전한 장 부의장을 따라 YS도 총리실 비서관으로 옮긴다.

김 전 대통령은 행정부에 몸담은지 불과 3년여만인 1954년 정계에 입문한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 공천을 받아 자신의 고향 거제에 출마, 약관 25세에 금뱃지를 다는 파란을 일으킨다.

최연소 국회의원이란 유명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국회의원 김영삼’의 삶은 자유당시절의 분열된 정치상황과 맞물려 순탄치 않았다. 이어 군부독재의 탄압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고난의 세월이었다.

김영삼대통령

YS는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추진하자 반대표를 던지고 탈당, 본격적인 투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4대 총선에서는 자유당의 집요한 방해로 당선에 실패, 야당 정치인 김영삼의 삶이 시작된다. 그는 여당대표가 되기까지 그 이후 30여년간 야당 정치인으로 살아간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투쟁의 상징, 투사로서의 강렬한 이미지는 제5공화국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시절이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저지에 앞장섰던 그는 서울 상도동 자택 골목에서 초산테러를 당하는 등 본격적인 탄압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기수, 투사로서의 정치인 삶을 시작하게 된다.

1972년에는 박 대통령의 유신 선포에 반대하자 가택연금을 당해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당시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영삼의 말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제명과 가택연금, 그리고 국회의원에 출마조차할 수 없는 탄압이 이어졌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끝났지만 상도동 김영삼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한번 손발이 묶이게 된다.

5·17 조치로 자택에서 연금조치된 그는 1984년 민주화 운동 동지이자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전격 손을 잡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 군부독재 전두환퇴진 운동에 나선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관철하는데 성공했지만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신군부 출신 노태우에게 대권을 넘기며 패하고 만다.

YS는 90년 민주화운동 변절시비를 무릎쓰고 여당인 민주정의당, 김종필 전 총리가 이끌었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단행하는 승부수를 던진다.

변절시비논란에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고, 드디어 92년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193만여 표차로 꺾고 14대 대통령에 당선, 대권을 거머쥔다.

■ 금융실명제, 하나회척결, IMF와 측근비리, 그 파란의 역사

태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문민시대를 열며 금융실명제 도입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개혁에 나선다.

1993년 8월12일, “이 시각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고 선포한 YS는 각종 금융비리 사건과 정경 유착의 뿌리를 뽑기 위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개혁정책을 전광석화처럼 발표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도 YS의 치적으로 꼽힌다. YS는 5·18 특별법 제정을 추진, 12·12 쿠데타로 집권을 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모두 구속, 구치소로 보내고, 광주민중항쟁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승격시켰다.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완전 척결한 것도 당시로선 개혁이었다. 한보그룹과 기아차 부도 등 대기업 연쇄부도와 외화부족으로 IMF사태를 맞은 것은 그의 정치역정 최대 오점으로 기록된다.  차남 현철씨가 한보비리, PCS사업자 한솔그룹 비리 등에 연루된 것도 정치인 김영삼의 허물로 기록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결국 임기 말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는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며, 측근비리를 다스리지 못해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는 대통령으로 남게됐다.

하지만 군부독재와 맞선 그의 민주화투쟁은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족적으로 남아있으며, 금융실명제와 군부독재 역사바로세우기, 하나회 척결 등은 YS가 이룬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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